生平
太醫 白光炫 生於仁祖世. 為人醇謹 在鄕里 恂恂 若愚人. 身長大 好須髥 目炯炯 有光. 家素貧 常衣大布貼裏 戴破笠 施施行市隧間 從人匃貸 人多厭之. 少年或抵踢侮戱 光炫笑而不怒.初善醫馬 專用針療之. 不本方書 久益手熟 以試人腫瘡 往往有奇效. 遂專以治人為務 以是周行閭閻 得視人腫瘡 甚多 其知益精而針益善. 凡疔疽毒盛有根者 古方無治法而 光炫遇之 必用大針 決裂䟽毒拔根 能轉死為生. 初則用針過猛 或至殺人 然 其效而活者且眾. 故病者日集其門而 光炫亦自喜 其術 為之益力不懈. 用此名聲大振 號曰 神醫.
肅廟初 選補御醫. 有功 輒加秩 至崇品而 歷職為縣監 閭里榮之. 然其遇病者 無貴賤疎親 有請卽往 往必盡心極能 見其良已 然後止. 不以老且貴為解 非惟為技能所使 蓋其天性然也.
餘年十五時 內舅姜君 病唇疔 邀白太醫 視之曰 不可為矣 恨不前二日見之 急治喪具 夜必死 至夜果然 時白太醫 已篤老而神識尙全 能知病 死生不失毫髮 其在盛時 至其家 治某病而 得神效 起死雲者 非妄語也. 白太醫卒 其子興齡 嗣為業 粗有能聲弟子 有朴淳者 亦以治腫名.
今世疔疽決裂之法 自白太醫始而 後學者 傳為經驗之方 然其子孫與他人學者 皆莫能及焉 人有病疽毒 難治者 必嘆曰 世無白光炫 噫 死而已矣 (ࡔ浣岩集ࡕ)
簡介
馬醫在中韓兩國古代歷史上是專治馬病的獸醫。韓國MBC在即將到來的金秋九月也為韓劇迷們帶來一部以馬醫為題材的韓劇,主角曹承佑所飾演的由馬醫一步步自學成才成為御醫的人物原型,就是堪稱“韓國外科手術第一人”的白光炫。 조선 후기의 어의이다.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으나, 사람의 종기도 침으로 째어 치료하는 외과적 치료법을 개발하여 많은 환자를 완치하였다. 白光炫是朝鮮後期的御醫。起初以為馬治病而成為馬醫,以試用針劐破人腫瘡,開發出一套獨特的外科治療法,治癒了許多患者。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숙미(叔微)이다. 독학으로 침술을 익혀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쳤다. 침술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데 자신이 생기자, 사람의 종기도 침으로 째서 독을 없애는 시술을 해 보았는데, 효험을 본 사람이 많았다. 그 후 마의(馬醫)에서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하여 풍부한 임상 경험을 쌓았다.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깊은 악성 종기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리니 사람들이 신의(神醫)라 불렸다. 白光炫本籍林川,字叔微。自學針術,針術益善,初善醫馬。久益手熟便生自信,試用針劐破人腫瘡,去毒,受試者均十分靈效。隨後由馬醫轉業為專治人腫瘡的醫生,積累了豐富的臨床經驗。即使毒性強盛、根深蒂固的腫瘡也能治癒,被人們稱為“神醫”。 비록 의과방목(醫科榜目)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종기 치료술로 현종 때 치종(治腫) 교수로 내의원 의관을 겸하였다. 또한 현종의 목에 난 큰 종기와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발찌와 부어오른 염증, 숙종의 목구멍 종기와 배꼽종기 등을 치료하였다. 儘管生平沒有考上醫科榜目,但他卓越的腫瘡針療術令他在顯宗時期作為治腫瘡高手兼任了內醫院醫生的職位。顯宗喉嚨所生的巨瘡以及顯宗之妃仁宣王后腳踝上腫起的炎症、肅宗喉嚨的腫瘡與肚臍腫瘡等,均一一治癒。 1670년 현종의 병을 완치한 일로 다른 의원과 함께 한 품계가 더해졌고, 마침내 어의(御醫)에 올랐다. 1683년(숙종 9) 강령현감(康翎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옮겼다. 1691년에는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숭록대부에 올랐다. 1670年他因治癒顯宗的病,升至與其他醫官同一品,最後升至御醫一位。1683年(肅宗9年)被任命為康翎縣監,又被命為抱川縣監。1691年成為知中樞府事,後又被命為崇祿大夫。 장지연(張志淵)이 '우리나라에서 피부를 째서 치료하는 법은 백태의(白太醫:白御醫)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것처럼, 침으로 수술하는 외과적 치료술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다. 張志淵曾曰:“在我國(韓國)劐破人皮膚治療的,白太醫是第一人”,可以說白光炫是韓國實施外科手術的第一人。 |